(브금 재생)
다음 포스팅은 무엇을 해볼까 많은 고민을 해봤습니다.
바람의 나라는 워낙 유명한 게임이고, 저 같은건 발치에도 못미칠 만큼 고수분들이 많았기에
조금 망설여 졌지만. 그래도 한 번 써볼까 합니다.
간단하게 소개 하자면 바람의 나라는 국내 최초의 온라인 머그 게임 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세계 최초의 온라인 게임 이라는데 이는 틀린 정보 이구요...
국내 최초가 맞는 표현 입니다.
첫 걸음
제가 바람의 나라를 처음 접한건 1999년 지하에 위치한 PC방에서 였습니다.
당시엔 디아블로2와 리니지, 포트리스2도 같이 전성기를 맞이 하였지만
그 중에 단연 으뜸은 바람의 나라 였습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동네에서 같이 뛰놀던 형들이 자리에 앉아서 바람의 나라를 하고 있을때
다가가 저에게도 알려달라고 청했습니다.
(반드시 거쳐야 했던 모뎀창)
처음 시작 했던 마을의 이름은 천안성.
다른 보통의 마을과는 디자인이 약간 달랐습니다.
그렇게 2시간을 내리 다람쥐만 잡다보니 레벨 5가 되었고
직업을 갖기전엔 안된다며 경험치 상승이 중단 되었던게 기억 납니다.
하지만 PC방 내 아무도 직업길드가 어디있는지 몰랐고
동네 형들과 친구들 5명이 달라 붙어 가입되는 직업길드를 찾아 말 그대로 모험을 떠났습니다.
얼마나 헤맸을까?
천안성에서 도적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재물은 도토리 몇개와 토끼고기 였던거 같은데
사부님께 대충 쥐어주고 도적이 되서 기뻐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직업을 갖고 나면 더 쎄지고 게임이 쉬어지는 줄 알았더니
필요 경험치만 늘어나고 아무런 이점이 없었던 점에서
큰 실망을 했었습니다.
무기가 목도에서 목검으로 바뀌고,
사냥터가 쥐굴이 되었을때
레벨 11을 찍으니 체험판이 끝났다며 접속이 끊겼습니다.
저는 바람의나라가 되는 PC방을 찾아 떠납니다...
도적?
(내용과는 상관 없습니다)
직업을 가진 기쁨도 잊은채 평민과 다를빠 없는 사냥을 계속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레벨 18을 찍었을 무렵, 속성 마법을 배우게 되는데
이것이 신세계 였습니다.
이 마법을 주술사는 레벨6때 배운다는걸
나중에 듣고서는 깜짝 놀랬지요.
하지만 이내 곧 의문이 들었고
씨팔 이게 무슨 도적이야?라는 물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uuuuuuu의 반복과 반 강제된 뢰진주는
막대기질 보단 훨씬 빠르게 잡아서 좋긴 한데 도대체 이걸 언제까지 계속 해야되는지 몰랐습니다.
당시 피씨방의 가격은 1시간에 1500원 이었고, 저의 용돈은 제한적 이었습니다.
항상 시작 하기전 어떻게 할지 최적의 루트를 짜야만 했지요
영겁의 시간을 투자하여 얻은 최종 결론은
쥐굴 다음 나오는 뱀굴에선 약간 더 색이 짙은 뱀이 있습니다.
이 녀석은 경험치 1000을 줬고 뢰진주 두 세방에 죽었지요
여우나 곰은 경험치를 훨씬 많이 주었지만 맺집과 데미지가 강력하여 도망다니며 사냥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힘들게 다른데서 사냥 하지 말고
투명과 비영승보가 갖추어 질때까지 뱀굴에서 살기로 작정 합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돈과 시간을 PC방에 꼴아 박고 나서야
38을 찍고 꿈꿔왔던 철검을 낀 저는 또래 아이들 중에선 이미 슈퍼스타가 되있었습니다.
쥐 다음 몬스터는 구경도 못해본 친구들에게 말로만 들었던 자호를 보여줬으니까요.
게임에 대한 지식이 쌓이고 노하우를 터득하니
레벨업 속도에도 탄력을 받게 되었죠.
눈 깜짝할새 50을 찍게 되고 웅담과도 작별하게 됩니다.
지존이 되다
무기는 철검에서 야월도가 되었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그룹사냥을 시작 했습니다.
도사는 체력을 빨리 밀어 줬지만 힘들었고
주술사는 상대적으로 도사보다 느린대신
마비라는 마법이 있어서 굉장히 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시기에
가정용 PC의 보급과 함께 대한민국에 ADSL이 상륙 합니다.
2000년 6월 18일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거실에 떡하니 설치 되있던 PC.
저는 더 이상 PC방에 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저는 더 이상 시간에 쪼들려 급해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루에 1시간씩 느리지만 꾸준히 근 이 지나서야 레벨 50을 찍었지만
하루죙일 내 마음대로 게임을 할 수 있게 되니
99를 달성 하는데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옷의 색깔이 변했고 사냥 실력도 나날히 올라갔습니다.
전갈-유령-도깨비로 이어지는 사냥터의 계보.
별거 아니지만 웃긴점이 하나 있었는데
고구려의 도깨비굴은 걸어서 갈 수 없었습니다.
필살기는 상대적으로 전사보다 빨리 배워 초반엔 유리했지만 (도적 50 전사 73)
90쯤 되니 체력적인 우위가 높은 전사의 지명도가 훨씬 높았습니다.
그때쯤 되면 도사들도 몇 대는 맞아도 버티고
생명의기원 이라는 최고의 회복기가 있었기 때문에
도적은 밀려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도적들이 99 찍기전엔
절대로 경험치를 팔면 안된다던 금기를 깨고
눈물을 삼키며 경험치를 팔았습니다.
그렇게 경험치를 팔아도
최고난이도 던젼인 흉가의 출입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순수하게 플레이 타임 으로만 따졌을때
90-99가 1-90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그렇게 깹굴에서 한 달 가까이 쳐박혀서 사냥만 하고
제가 99를 달성할때 쯤 거의 동시에
일본과 3차 승급이 나왔습니다.
특히나 주술사 1위 였던 척 같은 경우에는
다른 랭커들과는 그 궤도를 달리 했는데,
이 당시 현인은 조~~금 대단 했습니다. (복합적인 의미로)
진짜 밥만 먹고 게임만 했어야 가능했을 정도로....
소수의 인원 밖에는 도달 할 수 없었던 경지 입니다.
잠깐의 휴식은 도약하기 위한 준비자세
(내용과는 상관 없습니다)
99까지 너무 급하게 달려 오느라 몰려오는 현자타임에 심신이 지친 나머지
사냥이 아닌 다른게 하고 싶었던 저는
먼저 한 두고개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가장 처음 토끼를 잡고, 다람쥐를 잡은 다음 돼지를 지나쳐
마지막엔 퀴돌이를 찾아서 퀴즈를 풀고 네 고개에 입장하면 뱀이 나왔죠
홈페이지에서만 보던 북방대초원에 가서 경번팔찌도 만들어 봤습니다.
일본에서 일주일간 틀어박혀 먹자짓으로 이가닌자의 검도 만들어 봤구요
마지막엔 당시 경쟁의 꽃인 어전의 밭 이란 곳에서 몇날 며칠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못먹음)
부여성이나 국내성같이 큰 성의 무한장은 지존들이 즐비 했는데
그 외의 성에는 상대적으로 저렙들만 이용 했습니다. 높아 봤자 70~80
그런 곳에 가서 보스 노릇도 해보면서 재밌게 놀았습니다.
놀자판에 빠져 있던 저를 구한건 어느 진인분의 마법 이었습니다.
혼잡한 주막 앞,
(이런 느낌)
밀집 되있는 인파 정중앙에서 신령지익진과 파력무참을 사용 하는데
그게 얼마나 멋있던지
저에게 다시한번 사냥의욕을 불어 넣기에 충분 했습니다.
이때 저의 체력은 3만이 안됐고 자객이 되려면 6.5만을 달성해야 했습니다.
20억당 1만 이었으니 대략 70~80억이 남은 셈이지요
주말에 최고던젼인 흉가에서 하루죙일 사냥만해도 5억을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일단 도사 경쟁이 너무 치열했고, 몹들이 쎄고 빠르고 존나게 많았습니다.
거기에 친분있는 도사가 아니라면 마지막 굴에서 죽이고 부활을 안해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 시체 찾는걸 포기해야 했습니다.
맨몸으로 다시 올라가는건 정말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렇다고 다음 사람 오기까지 기다리자니
나중엔 없어졌지만 제 2의성, 제 3의성, 제 4의성 이러면서
한 개의 성이 4개까지 존재 했기 때문에
@@성 제 3의 성 흉가 10굴에 다음 사냥 팀이 오는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진짜 많은 사람들을
바람의 나라 때문에 온 오프 안가리고 사귄거 같습니다.
특히나 제가 자주 다니던 PC방은 당시 유행하던 다른 게임들 보다
바람의 나라가 주류 였고 모두가 같은 서버 였기에
가장 어렸던 저는 형, 누나, 아저씨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었습니다.
제가 1차 승급을 할때 피씨방 주인 아저씨가 팔괘를 주셨는데
그 분의 생김새는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부시시한 장발에 수염 그리고 안어울리는 돋보기까지...
SHOW ME THE MONEY
제가 바람의 나라를 처음 했을때
자객 마크와 진검 마크가 뭔지 몰랐습니다.
엽전 마크 있는 사람은 돈이 무한으로 있는줄 알았고
구름 마크가 달린 사람은 날아 다니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객이 보이면 괜히 옆에가서 "넥슨은 돈을 뿌려라~" 도배를 하곤 했지요 -.-...
2년 전부를 바람 하는데 쏟은건 아니지만
어찌됐든 우여곡절 끝에 저도 엽전을 달게 됐습니다.
자주 다니던 PC방에서 도움을 많이 줬지요.
그런 저에게 주인 아저씨가 제안을 하나 했습니다.
올때마다 공짜로 게임 시켜 줄테니깐 작업을 하나만 하자고 하십니다.
(신세계?)
저에게 설명 해줄땐 반신반의 했습니다.
방법은 간단한데 도사의 소혼강신? 이라는 마법이 있습니다.
각종 몬스터를 소환 해서 도사를 방어 할때 쓰이는 마법인데
문제는 이 놈들이 죽을때 아이템을 떨군다는 겁니다.
이 점을 파고들어 주모 앞에서 해골을 소환 하고
그 해골을 잡아서 먹은 호박을 바로바로 판매 하면
돈이 무서운 속도로 쌓여갔습니다.
주모 한테 맡긴 돈이 500만전을 넘었을 무렵
저의 손은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만져 본적이 없었거든요
당시 200:1 이었으니깐 방금 그 잠깐의 알바로 한달치 용돈을 벌었던 겁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본 알바가 작업 이라니 ㅡㅡ ㅁㅊㄷ ㅁㅊㅇ....
틈틈히 PC방에 찾아가서 제공되는 라면과 함께 작업을 했고
부유한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황금기 그리고 몰락
바람의 나라의 인기는 식을줄 몰랐습니다.
일본에 이어 용궁, 중국, 환상의 섬까지 연이은 대박이 터졌기 때문이죠
개중에도 4차 승급은 정점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하지만 2003년 3월 봉황서버의 출현과 동시에 나타난 새버전은
많은 유저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처음엔 구버전과 새버전 골라서 접속 할 수 있었지만
바람의 나라는 점점 새버전에게 그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새버전 첫 패치 백두산을 시작으로 후의 모든 패치는 새버전만 적용됐기 때문이죠.
이때부터 모든 유저가 예상 하고 있었을거라 생각 합니다.
백두산 이후 큰 패치가 없던 어느날 느닷없이
기존에 있던 활과 화살통을 없애고 궁사를 출시 했습니다.
처음엔 이런 개같은 쓰레기가 도대체 뭐냐라고 부르짖던 사람들이
궁사의 사기성을 알아채곤 너도나도 키우기 시작했죠
제 기억에 새버전으로 로그인시 데미지가 표시 됐는데
보통 100만 격수가 필살기를 쓰면 데미지가 100만 이었지만
궁사 같은 경우엔 표시되는 데미지가 1억이나 됐습니다.
공성전의 새시대가 열렸죠
하지만 이런 궁사도 초반엔 터무니 없이 약해서
사냥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스킬이고 뭐고 다 쓸모 없었거든요
저렙땐 그냥 월아검으로 때려 잡아야 했기때문에
월아검과 세시,연청,강철셋의 수요가 폭발하여 시세가 2~3배 뛰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오고야 말았습니다
돌연
무료화 선언!!!
상용화 9년만에 무료화 선언으로
초 대박을 터뜨려 동시접속자는 13만을 찍는 기염을 토했지만
아쉽게도 이는 초석에 불과 했습니다.
2005년 11월 2일 6.70버전 새버전 클라이언트 단일화
그대로 구버전을 없애면 유저층 다 빠져나갈 것을 염려한
운영진이 내놓은 초 강수였던 셈
그리고 저는
딱 여기까지 였습니다.
저의 바람의 나라 이야기는 이 뒤가 없습니다.
궁사에 이은
새버전 단일화
생산
하우징
캐쉬템
기존 바람의 나라와 맞지 않는 이 급격한 개노답 5시리즈 변화들은
무료화라는 초 강수를 내던지고도
많은 유저들의 등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사설서버 에서는 그 때의 향수를 느낄 수 있다지만
이제는 제 추억의 책장 한 켠에서 고이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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